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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전체: 123건
Q&A
  • A 뚝딱~ 뚝딱~ 태조 임금님이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우고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왕의 조상님들을 모시는 ‘종묘’를 짓고 왕실가족과 나랏일을 돕는 신하들이 머무르는 ‘궁궐’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궁궐을 짓는데 걸린 시간은 10개월 정도였습니다. 궁궐 공사 이전에 먼저 땅을 잘 살피는 조사를 하였고 태조 3년(1395) 12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다음해 9월에 완성하였습니다. 궁궐 안에는 나랏일을 의논하는 곳, 왕과 왕비께서 사는 곳, 신하들이 출근해서 일하는 곳, 궁궐담장과 출입문 등이 있었고 궁궐의 이름을 ‘경복궁’이라고 지었답니다.
  • A 경복궁과 중국의 자금성은 궁궐의 모습이 네모난 형태입니다. 그리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중요한 건물들이 지어져 있고 양 옆에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 서 있지요. 모두 웅장한 궁궐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가지런히 정리된 건물들이 가득합니다. 그럼, 경복궁과 자금성은 서로 닮은 점만 있고 다른 점은 없을까요? 자금성은 폭이 넓고 깊이가 얕은 대신, 경복궁은 폭이 좁은 반면 깊이가 매우 깊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그리고 자금성 밖으로 넓은 물줄기가 자금성을 감싸고 있어요. 이러한 물줄기를 ‘해자’라고 하는데 밖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해서 궁궐 밖에 땅을 파고 물로 채운 것입니다. 하지만 경복궁 밖에는 자금성처럼 궁궐을 감싸는 물줄기가 없습니다. 적을 방어할 목적으로 물길을 두를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 다른 점은 자금성이 있는 곳은 산이 없는 평평한 땅입니다. 자금성 뒤에 산이 있는데 이 산은 땅을 파낸 흙으로 만든 인공산입니다. 하지만 경복궁은 백악산(북악산) 아래에 궁궐을 지어 자연의 요새가 있는 셈입니다. 옛날부터 우리 민족은 백두산을 신령한 산으로 여기고 소중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백두산의 신령한 기운이 산줄기를 타고 경복궁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했었지요. 옛날 지도에서 백두산의 산줄기가 경복궁 교태전의 아미산으로 이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 A

    처음에 경복궁 담장 안에 만들었던 건물이 약 755여 칸 정도라고 합니다. 경복궁 안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건물들이 점점 늘어나게 됩니다. 경회루, 교태전 등이 추가로 지어진 건물들이죠.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지 270여년 뒤인 고종 임금님 때 다시 지어집니다. 이 때는 7,700여칸 정도 되었답니다. 처음 경복궁을 지을 때와 비교해 보면 건물이 아주 많이 늘어난 셈이죠. 그 가운데 일제 침략기를 거치면서 1/10인 36동밖에 남아있지 않게 되었어요. 일제강점기 때 총독부 건물이 지어지고 야외 전시관으로 사용되면서 많은 건물들이 사라진 겁니다. 하지만 경복궁은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 사라진 건물들을 1990년부터 다시 짓고 있어요. 원래 경복궁 뒤편에는 후원이 있었어요. 그 자리에 대통령이 계시는 청와대가 있습니다. 앞으로 더욱 멋진 경복궁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궁궐의 건물 크기는 어떻게 계산할까요?

    지금은 건물의 넓이를 가로와 세로의 길이를 곱해서 표시하지만 옛날에는 기둥과 기둥 사이를 1칸으로 보고 그 칸 수를 세어서 넓이를 표시했어요. 예를 들어서 경복궁에서 가장 큰 건물인 근정전은 앞면의 기둥이 6개인데 기둥과 기둥 사이를 1칸이라고 하니깐 근정전의 앞면은 5칸이겠죠. 근정전 옆면도 기둥이 6개라서 옆면이 5칸입니다. 그래서 근정전 건물의 크기는 앞면 5칸에 옆면 5칸을 곱해서 모두 25칸 건물이 됩니다. 경복궁을 구경하면서 건물의 크기를 계산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죠?

  • A 지금의 청와대 자리는 옛날에 경복궁 후원이 있던 자리입니다. 북쪽 문인 신무문 뒤로 후원이 있었는데 후원에서는 왕과 신하들이 활쏘기를 하거나 나라의 인재를 뽑는 과거시험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남산에 있던 총독부를 경복궁으로 옮겨 청사를 지으면서 일제침략자들은 총독이 살 집을 경복궁 후원에 지었습니다. 총독부를 경복궁에 지어 나라의 기운을 빼앗고 독립의 의지를 꺾으려고 하였습니다. 해방 후에 후원의 시설은 ‘경무대’로 이름을 바꾸어 대통령 사무실로 사용되었는데, 후에 새로 집을 짓고 ‘청와대’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총독이 살던 집은 헐어 버렸습니다.
  • A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면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모든 궁궐이 불에 타버렸어요. 선조 임금님은 임시로 지금의 덕수궁에서 머물렀는데, 궁궐을 다시 지을 때 경복궁은 짓지 못하였습니다. 규모가 커서 재료와 인력을 동원하기 어렵다는 이유와 자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창덕궁과 창경궁을 먼저 짓게 됩니다. 이후에 약 270년 동안 계속 빈자리로 남아 있다가 고종 임금님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었어요.
  • A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게 글자를 사용하도록 ‘훈민정음’을 만들었어요. 다른 나라 글자들은 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만들어지고 누가 만들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요. 하지만 한글은 만든 사람들과 만든 시간을 알 수 있고 과학적이기 때문에 외국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어요. 그리고 한글은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인정을 받아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지요.


    한글과 경복궁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한글을 발명한 장소인 집현전은 수정전 자리에 있었습니다.

  • A 대장금은 중종 때의 의녀입니다. 의녀는 아픈 사람의 병을 고치는 여자 의사를 말하죠. 대장금이 병을 잘 고치자 중종임금님은 대장금을 가까이 두고 병을 치료받고 싶었어요. TV 드라마 ‘대장금’에서 대장금은 의녀에서 궁중요리사로 변신하여 대단한 활약을 합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책에는 대장금에 대해서 병을 치료하는 의녀의 기록만이 있어서 어떻게 궁중요리사가 되었고 또 어떻게 많은 활약을 했는지 잘 알 수는 없어요. 궁궐에는 왕실가족이 생활하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옷을 만들고 음식을 요리하는 궁녀들이 있었어요. 궁녀들은 일을 나누어 궁궐에서 일을 했는데, 음식을 만드는 곳을 수라간이라고 합니다. 수라간에는 찬 음식을 만드는 생과방, 더운 음식을 만들고 잔치 때 떡과 음식을 만드는 소주방이 있었어요.
  • A 명성황후는 향원정 북쪽에 있는 건청궁 곤녕합에서 일본인들에게 시해되었어요.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려고 했는데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려고 하자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이죠. 어떻게 일본은 경복궁에 들어와 명성황후를 시해했을까요?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 광화문으로 들어와 근정전 서쪽 담장을 돌아서 경복궁 뒤편에 있는 건청궁으로 몰래 들어갔어요. 건청궁에는 임금님이 계시던 장안당과 명성황후가 계시던 곤녕합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곤녕합으로 가서 명성황후를 살해했다고 합니다. 명성황후가 숨을 거두자 건청궁 동쪽에 있던 언덕(녹산)에서 시체를 태우고 재는 향원정 연못에 버리고 타다남은 시신은 녹산에 묻었다고 합니다. 정말 끔찍한 일이죠. 궁궐을 침입하여 한 나라의 왕비를 죽인 일은 제국주의 일본의 야만성을 드러낸 것이지요.
  • A 건청궁 앞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전깃불을 사용하여 어두운 밤을 밝혔던 곳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이 조선으로 돌아와서 고종 임금님에게 어두운 밤을 대낮같이 밝게 해주는 전구를 알려드립니다. 이 사실을 알기 7년 전에 미국의 발명왕 에디슨이 전깃불로 만든 전구를 발명했었죠. 고종은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에게 전기공사를 맡기게 되었고 에디슨 전기회사는 건청궁 앞에 있는 연못(향원지)의 물을 끌어들여 전기를 만드는 발전소를 지었습니다. 경복궁에 전깃불이 들어온 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이었고 일본과 중국보다도 2년 정도 빠른 것이었어요.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한국의 전기발상지’ 글로 새긴 돌이 건청궁에 있습니다.
  • A 경회루 연못에서 청동으로 만든 용(龍) 한 마리가 발견되었어요. 1997년에 경회루 연못을 청소하려고 물을 뺐을 때 발견되었는데 길이가 146.5㎝, 넓이가 14.2㎝, 무게가 66.5㎏입니다. 옛날부터 용은 물을 다스리고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는 신비한 동물로 생각되었답니다. 옛날 기록에 보면 경회루에 불이 나지 않도록 빌기 위해서 왕의 명령으로 연못 북쪽에 한 쌍(두 마리)의 용을 넣었는데, 그 중 한 마리의 용이 발견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옛날에 나무로 건물을 지었어요. 나무는 불에 약하기 때문에 불이 나면 쉽게 타버립니다. 나무로 지어진 경회루가 불에 타지 않도록 바라는 마음에 비를 내리는 용을 연못에 넣어 둔 것이죠. 발견된 한 마리의 용은 지금은 경회루 연못이 아니라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 중입니다. 박물관에 찾아가서 용의 생김새를 보고 싶지 않나요?
  • A 경복궁 근정전에 가면 동서남북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 청룡·백호·주작·현무와 시간과 방향을 나타내고 지키는 12지신 가운데 쥐·소·호랑이·토끼·뱀·말·양·원숭이·닭 등을 볼 수 있어요. 경복궁 근정전은 나라의 중요한 행사가 열리던 곳입니다.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을 지나면 넓은 조정 마당이 보이고 바로 앞에는 커다란 근정전 건물이 있어요. 근정전 건물은 돌로 쌓은 월대 위에 지어져 더욱 웅장하게 보입니다. 조정을 지나 근정전 월대로 올라서면 계단 주위에 동물 조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동서남북을 지키는 청룡(동)·백호(서)·주작(남)·현무(북) 등이 있고 12지 동물들이 있습니다. 12지 동물들 중에서 개와 돼지는 보이지 않아요. 왜 그럴까요? 여러분이 나중에 커서 왜 개와 돼지가 없는지를 알려 준다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것입니다. 기대를 해도 될까요?
  • A 임금님은 무척 바쁜 하루를 보냅니다. 임금님이 해야 할 일은 만 가지 넘는다고 하는데, 임금님의 하루는 대개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신하들을 만나서 나랏일을 의논합니다. 그리고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 공부도 열심히 하셨지요. 하루에 3번 이상 공부하는 시간이 있었고 저녁 늦게 신하들을 불러서 궁금한 것을 묻기도 했어요. 임금님이 하시는 공부는 유교와 역사 공부를 많이 하셨어요. 가장 중요한 공부는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었지요. 임금님의 하루는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시간별로 알아보면 임금님이 아침에 일어나시면 부모님께 잘 지내셨는지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신하들을 만나고 공부를 하십니다. 아침을 드신 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신하들에게 이야기를 듣습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간단하게 식사를 하시고 공부를 하세요. 그리고 지방으로 떠나는 신하들을 만나고 다른 일을 보십니다. 저녁에는 궁궐을 잘 지키기 위해서 밤을 새는 신하들이 누구인지 확인을 하고 궁궐에 들어오고 나갈 때 사용되는 암호를 정하기도 합니다. 저녁이 되면, 식사를 하시고 낮에 다 하지 못한 일들을 마무리 하시죠. 그리고 어른들께 잘 주무시라고 인사를 드립니다. 하루의 일을 마치시면 잠시 쉬기도 하지만 책을 읽거나 궁궐에 있는 신하를 불러서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루를 마치면 편안히 잠자리에 드십니다.
  • A 궁궐은 나라를 다스리는 왕과 그 가족들이 생활을 하던 곳입니다. 그리고 왕과 왕비를 도와서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요. 나랏일을 보는 관리, 왕실가족들이 생활하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일을 하는 궁녀와 내시, 궁궐을 지키는 군인,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와 병을 고치는 의사 등 많은 사람들이 궁궐에서 살거나 출입을 하면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 경복궁에는 몇 명이 살고 있었을까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대개 3000명 정도가 궁궐에서 살거나 궁궐을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왕실가족, 궁녀, 내시 등이 500명 정도이고 궁궐을 지키는 군인이 2,000명 정도 그리고 나랏일을 보는 신하들과 궁궐에서 일하는 사람이 500명 정도입니다.
  • A 경복궁에는 임금님을 도와서 나랏일을 보는 관리들도 많이 있었어요. 남서쪽에 관리들의 사무실이 있었지요.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승정원, 임금님이 나랏일을 결정할 때 도움을 주는 홍문관, 궁궐을 지키는 내병조 등 여러 관청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임금님과 왕실가족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내의원과 음식을 맡은 사옹원, 옷을 담당하는 상의원 등이 있었어요.
  • A 경복궁에는 임금님을 도와서 나랏일을 보는 관리들도 많이 있었어요. 남서쪽에 관리들의 사무실이 있었지요.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승정원, 임금님이 나랏일을 결정할 때 도움을 주는 홍문관, 궁궐을 지키는 내병조 등 여러 관청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임금님과 왕실가족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내의원과 음식을 맡은 사옹원, 옷을 담당하는 상의원 등이 있었어요.
  • A 1917년 창덕궁 대조전에서 커다란 불이 났어요. 대조전은 순종 임금님이 사시던 건물인데, 불이 크게 번지면서 수 백 칸의 건물들이 사라졌지요. 이 때 대조전에 앞에 있는 희정당도 함께 잿더미가 되었어요. 얼마 후에 사라져버린 창덕궁을 다시 지었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경복궁 건물을 옮겨서 다시 지었습니다. 강녕전은 희정당, 교태전은 대조전을 짓는데 사용되었어요. 하지만 창덕궁 대조전ㆍ희정당의 모습과도 다르고 경복궁 강녕전ㆍ교태전의 본래 모습과도 다르게 변형되었지요.
  • A 경복궁을 둘러보다가 건물 기둥과 지붕 처마 밑에 마치 그물처럼 생긴 것들이 있어요. 이 그물은 ‘부시’라고 합니다. 새들이 날아와 처마 밑에 둥지를 짓거나 걸터앉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지요. 여러분이 사는 집에서도 기둥과 처마 사이에 새들이 둥지를 짓거나 머물러 쉬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새들이 있는 곳에는 새똥이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게 마련이죠. 궁궐에서도 만약에 새들이 처마 밑에 둥지를 만들면 새똥 때문에 나무 기둥과 주위가 지저분해질 겁니다. 또 궁궐 건물은 일반 집과 다르게 나무에 칠을 한 단청으로 예쁘게 꾸며져 있어요. 단청을 칠하는 게 꽤 비싸기도 했답니다. 이렇게 예쁘고 값비싼 궁궐 건물이 새똥 때문에 지저분해져서도 안되겠지요.
  • A 자경전 뒤편 담장에는 ‘십장생 굴뚝’이 있어요.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의미가 담긴 십장생이 굴뚝에 새겨져 있어서 ‘십장생 굴뚝’이라고 부르지요. 굴뚝 벽면을 보면, 가운데에 커다란 조각이 있고 위 아래에 작은 그림들이 있지요. 가운데 커다란 그림이 십장생 조각입니다. 그 안에는 해, 산, 구름, 바위, 소나무, 대나무, 거북이, 사슴, 학, 불로초 등이 새겨져 있어요. 그리고 십장생 조각 위 아래에 불가사리와 학이 새겨져 있어요. 불가사리는 불을 잡아먹는다는 상상의 동물이지요. 또 다른 조각이 숨어 있는데, 어디에 있을까요? 십장생 굴뚝 옆에 ‘박쥐’와 ‘당초(식물)’이 새겨져 있어요. 옛날에는 박쥐가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했었지요.
  • A 일제강점기 경복궁에서 박람회와 미술 전시회가 열리면서 많이 망가지게 되었어요. 궁궐은 나라를 대표하는 임금님이 계시던 곳이기 때문에 일본이 일부러 망가뜨리려고 했었지요. 일본은 박람회와 전시회를 핑계로 건물들을 헐어 팔기도 했어요. 경복궁이 박람회와 전시장으로 사용되면서 임금님이 살던 궁궐이 공원으로 바뀌게 된 것이죠.
  • A 임금님이 돌아가시면 시신을 궁궐 안 빈소에 모셨다가 장례 일정이 정해지면 왕릉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임금님의 혼이 담긴 신주를 궁궐 안 혼전에 모셔놓고 3년동안 상례를 치릅니다. 조선시대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것에 감사하기 위해서 3년 동안 슬퍼했었지요. 왕실에서도 돌아가신 왕과 왕비를 위해서 3년 동안 슬퍼하면서 상례를 지냅니다. 임금님이 돌아가시면 장례 준비를 합니다. 임금님이 돌아가셨는지 코와 입에 솜을 놓고 흔들리는지 확인해 보고 임금님이 입었던 옷을 가지고 지붕 위에서 떠나가는 혼을 부르기도 합니다. 임금님이 돌아가신 것을 가족들과 신하들이 확인하면 깨끗하게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히죠. 임금님의 시신을 관[재궁]에 넣고 사람들은 상복을 입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임금님을 생각하면서 슬픈 마음으로 왕세자는 즉위식을 합니다. 돌아가신지 1년과 2년이 되는 날에 제사를 지내고 또 한번 제사를 지내면 3년 동안 슬퍼하는 상례가 끝나게 됩니다. 이렇게 임금님이 돌아가신 후에 3년 동안 슬퍼하는 것이 끝나면 궁궐에 모신 신주를 종묘에 옮겨다 모시게 됩니다.
  • A 궁궐 지붕을 자세히 보면 지붕을 덥고 있는 기와뿐만 아니라 동물 모양의 기와들이 있어요. 동물 모양의 기와들은 조각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지붕을 덮고 있는 기와들처럼 구워서 만든 기와의 종류이지요. 이러한 기와를 ‘장식기와’라고 하는데 궁궐에 불이 나지 않도록 지켜주는 상상의 동물들이 지붕을 지키고 있는 셈이지요. 지붕 맨 위 좌우 끝에 있는 장식기와를 ‘취두’라고 해요. 취두 아래로 내려오면 ‘용두’가 있어요. 취두와 용두는 용의 모양을 하고 있지요. 그리고 용두 앞으로 나란히 줄지어 있는 것들이 ‘잡상’입니다. 잡상은 소설 서유기의 주인공인 삼장법사,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 등 상상의 동물들로 되어 있어요. 줄지어 선 잡상 아래를 보면 추녀 끝에 끼워진 ‘토수’가 있어요. 토수는 용의 모양을 하고 있지요.
  • A 경복궁 근정전에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있고 웅장하게 높은 근정전 건물이 보입니다. 근정전까지 이어진 길은 ‘어도’라고 하지요. 그런데, 어도 좌우에 비석처럼 생긴 돌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이 돌들은 무엇일까요? 이 돌들은 ‘품계석’이라고 해요. 품계석은 근정전에서 행사를 할 때 신하들이 자신의 지위에 맞게 줄을 설 수 있도록 표시한 돌들입니다. 품계석은 근정전을 바라보면서 오른쪽(동쪽)에 있는 품계석에는 문신들이 차례로 줄을 서고 왼쪽(서쪽)에는 무신들이 품계석에 따라 줄을 서게 되죠. 참고로 조정 마당에 깔린 돌들은 ‘박석’이라고 해요. 박석 겉 부분은 거칠어서 걷기에 힘들 수 있어요. 그런데, 거친 박석을 놓은 것은 신하들이 조심스럽게 다니도록 일부러 만들었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조심스럽게 경복궁을 구경하면 더 좋겠죠.
  • A 광화문 좌우에 호랑이처럼 생긴 조각상이 있어요. 이 조각상을 ‘해태’라고 해요. 해태는 상상의 동물로 해치라고도 불렀는데, 사람들의 잘잘못을 가려서 잘못이 있는 사람은 벌로 머리에 난 뿔을 사용하여 찔렀다고 합니다. 지금은 해태상이 광화문 바로 앞 좌우에 있지만 원래는 광화문 앞에서 대략 5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지요. 궁궐에 들어오는 사람은 가마나 말을 타고 올 때 해태상 앞에서부터는 가마와 말에서 내린 후에 걸어서 경복궁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 A 경복궁은 재입장이 불가합니다.
  • A 경복궁은 1954.3.1일부터 국민에게 개방하고 있습니다.
  • A 화재예방 순찰강화를 위하여 취약시간대 순찰인력을 증원하고 전자식 순찰시스템, 주요건물 시건장치 보강, 취약지역 경계울타리 설치, 경찰서와 연계한 순찰활동 등 화재방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소화전, 소화기 등을 지속적으로 확충하고 있으며, 분기별로 소방서, 경찰서 등과 연계하여 전직원 소방훈련을 실시, 소방차 진입로 확보를 위한 소방로 정비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 A 2008년 "왕과 나"·"대왕세종", 2011년 "뿌리 깊은 나무", 2012년 "광해", 2016년 "장영실", 2018~2019년 ʺ나랏말싸미ʺ 등의 드라마와 영화가 경복궁에서 촬영되었습니다. 하지만 경복궁은 사적으로 지정된 경복궁의 보존을 위해 일부 장소에 한해서만 극히 제한적으로 ʺ궁능활용심의위원회ʺ를 거쳐 촬영을 허가하고 있으며, 영화와 드라마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경복궁 촬영 화면들은 영화나 드라마 세트장에서 촬영한 것들입니다.
  • A 청와대 관람 신청은 청와대 홈페이(https://reserve.opencheongwadae.kr)에서 온라인으로 신청을 하시면 됩니다. 자세한 관람안내는 청와대 홈페이지를 참고하세요. 콜센터 1522-7760
  • A 경복궁 홈페이지 <자료마당-간행물> 메뉴를 클릭하시면 경복궁 관련 자료뿐만 아니라 국가유산청에서 발간한 더 많은 간행물을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A 경복궁에는 한복을 직접 대여하는 곳은 없으며, 경복궁을 방문하는 관람객이 수문장 복식을 직접 입고 사진촬영을 할 수 있도록 "수문장 복식체험"을 광화문 안 <수문장청>에서 실시하고 있습니다. 기타 자세한 사항은 국가유산진흥원으로(02-3210-1645)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 A 경복궁에서 봄철에 보실 수 있는 대표적인 꽃나무로는 매화, 살구, 앵두, 능수벚꽃 등이 있습니다. 개화 시기는 3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이나 기상여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 A 현재 경복궁에서는 개인별 자원봉사활등은 실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기관이나 단체와의 협의를 통하여 고건물 청소 및 경내 환경 미화활동을 주기적으로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복궁 궁궐안내해설 자원봉사의 경우에는 우리궁궐지킴이 또는 우리궁궐길라집이 등의 시민자원봉사단체에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 A 경복궁에서 궁궐안내해설 자원봉사를 하시려면 시민자원봉사단체인 궁궐지킴이나 궁궐길라잡이에 가입하시면 됩니다. 약 1년간의 교육을 수료하시고 실습을 거친 후에 궁궐안내 자원봉사활동을 하실 수 있습니다. 궁궐지킴이 혹은 궁궐길라잡이 사무실로 문의하시면 자세한 사항을 상담해드립니다. 궁궐지킴이 <02-723-4206 www.rekor.or.kr> 궁궐길라잡이 <02-735-5733 www.palaceguide.or.kr>
  • A 단순한 관람 목적으로 한복무료관람 가이드라인에 맞는 한복을 착용하고 입장하는 경우에는 연중 관람시간 내에 무료입장입니다. 한복 무료관람 가이드라인에 맞지 않은 경우에는 무료입장이 되지 않으며, 행사 또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경우에는 사전에 경복궁관리소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 A 경복궁과 중국의 자금성은 네모난 형태의 방형으로 4면에 대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중요한 건물들이 주축선상으로 지어져 있고 양 옆으로 건물들이 배치된 형태입니다. 모두 웅장한 궁궐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가지런히 정리된 건물들이 가득합니다. 자금성은 폭이 넓고 깊이가 얕은 대신, 경복궁은 폭이 좁은 반면 깊이가 깊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그리고 자금성 밖으로 넓은 물줄기가 자금성을 감싸고 있습니다. 이러한 물줄기를 ‘해자’라고 하는데 밖에서 오는 적을 막기 위해서 인공적으로 땅을 파고 물로 채운 것입니다. 하지만 경복궁에는 자금성처럼 인공적인 해자가 없습니다. 자금성이 있는 곳은 산이 없는 평평한 땅입니다. 자금성 뒤에 산이 있는데 이 산은 자금성을 만들면서 나온 흙으로 만든 인공산 즉 가산입니다. 하지만 경복궁은 북쪽에 백악산(북악산)이 있는 곳에 궁궐의 터를 잡았습니다. 경복궁과 자금성의 크기를 단순 비교하면 자금성의 면적이 경복궁보다 더 큰 편입니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궁궐제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단순히 궁궐의 크기로만 비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중국은 국가의 공식적인 궁궐이 자금성만 있는 반면에 한국에서는 이궁제도를 통해서 경복궁 뿐만 아니라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궁궐로서 사용되었습니다.
  • A 경국대전에 따르면 "내시부는 왕궁에서 음식물 감독과 명령전달 궁문 수직청소 등에 관한 직무를 맡고 그 인원은 모두 140명이다. 내시의 관직은 종2품 상선에서 종 9품 상원까지 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대부분의 관부들이 궁밖에 청사를 두었듯이 내시부 역시 그 청사는 궁 밖에 있었습니다. 내시부는 궁궐밖의 한양북부지역, 경복궁의 바로 옆 지역으로 지금의 효자동에 해당하는 지역에 있었는데 이곳에서 환관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왕, 왕비, 세자, 대비, 후궁 등에게 소속된 내시들은 궁궐 안에서 오랜기간 동안 머물렀지만 거처를 두고 사는 것이 아니고 장번/출입번의 근무형태를 가지고 교대로 번을 서며 궁밖에도 거처를 두고 생활하였고 지금의 수정전 내 궐내각사에 위치한 내반원(내시들의 업무공간)으로 출근하였습니다. 왕실의 수발을 좀 더 효과적으로 들기 위해 대전과 중궁전에 가까운 수정전 지역 대전장청에 기거하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 A 역사적인 기록에 따르면 대장금은 중종 때 내의원에 소속된 의녀로, 의녀는 아픈 사람의 병을 고치는 여자 의사를 말합니다. 대장금이 병을 잘 고치자 중종은 대장금을 가까이 두고 병을 치료받기도 하였습니다. TV드라마 '대장금'에서 대장금은 궁중요리사로 변신하여 대단한 활약을 합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는 대장금이 의녀로서의 기록만이 있을 뿐, 궁중요리사와 관련된 내용은 없습니다. 드라마의 특성상 사실적인 기록에 의한 내용이 아닌 가공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궁궐에는 왕실가족이 생활하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옷을 만들고 음식을 요리하는 궁녀들이 있었습니다. 궁녀들은 일을 나누어 궁궐에서 일을 했는데, 음식을 만드는 곳을 수라간이라고 합니다. 수라간에는 찬 음식을 만드는 생과방, 더운 음식을 만들고 잔치 때 떡과 음식을 만드는 소주방이 있었습니다.
  • A 조선 초기 세종의 재위기간 초기까지도 왕비와 왕세자비의 명청을 사용하면서 비빈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종 14년(1432년) 예제(禮制)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왕비와 왕세자빈의 구별을 둠으로써 왕비는 관직의 품계에 속하지 않았으며, 왕세자빈은 내명부의 정1품으로 봉하였습니다. 관제상으로 엄격히 말하면 왕세자빈이 맞는 표현입니다만, 조선후기에 이르러 왕조실록의 기사에 왕세자와 왕세자비의 호칭이 함께 사용되기도 합니다.
  • A 왕비의 임신이 확인이 되면 출산 예정 두세 달 전에 내의원에 왕비의 출산을 위한 기관인 산실청을 설치하고 출산 예정 한 달 전에는 왕비의 처소에 미리 산실을 마련하고 준비물을 설치합니다. 왕비의 출산 이후에는 의녀가 산모와 아이의 몸 상태를 확인하여 하루에 서너 차례씩 산실청에 보고하였으며, 산실청에서는 이를 왕에게 알립니다. 출산 후 3일째 되는 날 산모와 아이는 목욕을 하였으며 산모는 이때 묵은 쑥을 넣어 끓인 쑥탕을 목욕물로 이용합니다. 7일째는 산자리를 걷고 산모와 아이가 무탈하다고 판단되면 산실청을 해산하였습니다.
  • A 조선시대 왕비 37명 중 실제 생몰연도가 확인된 왕비 32명의 평균 수명은 47.5세라고 합니다.(참고자료: 변원림씨의 [조선의 왕후]
  • A 임금님이 돌아가시면 시신을 궁궐 안 빈전에 모셨다가 나중에 장례 일정이 정해지면 왕릉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임금님의 혼이 담긴 신주를 궁궐 안 혼전에 모셔놓고 3년동안 상례를 치릅니다. 조선시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것에 감사하기 위해서 3년동안 슬퍼했으며 왕실에서도 돌아가신 왕과 왕비를 위해서 3년동안 슬퍼하면서 상례를 지냈습니다. 임금님이 돌아가시면 장례 준비를 합니다. 임금님이 돌아가셨는지 코와 입에 솜을 놓고 흔들리는지 확인 해 보고 임금님이 입었던 옷을 가지고 지붕 위에서 떠나가는 혼을 부르기도 합니다. 임금님이 돌아가신 것을 가족들과 신하들이 확인하면 깨끗하게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힙니다. 임금님의 시신을 관[재궁]에 넣고 사람들은 상복을 입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임금님을 생각하면서 슬픈 마음으로 왕세자는 즉위식을 합니다. 돌아가신지 1년과 2년이 되는 날에 제사를 지내고 또 한 번 제사를 지내면 3년동안 슬퍼하는 상례가 끝나게 됩니다. 이렇게 임금님이 돌아가신 후에 3년 동안 슬퍼하는 것이 끝나면 궁궐에 모신 신주를 종묘로 옮겨서 모시게 됩니다.
  • A 임금님은 무척 바쁜 하루를 보냅니다. 임금님이 해야 할 일은 만 가지 넘는다고 하는데, 임금님의 하루는 대개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신하들을 만나서 나랏일을 의논합니다. 그리고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 공부도 열심히 하여 하루에 3번 이상 공부하는 시간이 있었고 저녁 늦게 신하들을 불러서 궁금한 것을 묻기는 했습니다. 주제는 유교와 역사가 많고 가장 중요한 공부는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임금님의 하루는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시간별로 알아보면 임금님이 아침에 일어나시면 부모님께 잘 지내셨는지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아침식사를 하기 전에 신하들을 만나고 공부를 하십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간단하게 식사를 하시고 공부를 하시고 지방으로 떠나는 신하들을 만나고 다른 일을 보십니다. 저녁에는 궁궐을 잘 지키기 위해서 밤을 새는 신하들이 누구인지 확인을 하고 궁궐에 들어오고 나갈 때 사용되는 암호를 정하기도 합니다. 저녁이 되면 식사를 하시고 낮에 다 하지 못한 일들을 마무리 합니다. 그리고 어른들께 잘 주무시라고 인사를 드립니다. 하루의 일을 마치시면 잠시 쉬기도 하지만 책을 읽거나 궁궐에 있는 신하를 불러서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루를 마치면 편안히 잠자리에 드십니다.
  • A 왕이 후궁을 맞이하는 제도는 태종때에 와서 처음 만들어져 법적으로 "1빈2잉"을 제도화했지만 태종 자신은 물론 어떤 왕도 이 원칙을 지킨 경우는 없습니다. 후궁은 왕비 이외에 임금이 거느린 처첩을 통칭한 것으로 대개 종 4품부터 정1품의 작위를 받았으나 실제 임금님의 성은을 받았더라도 작위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공식적 기록으로 가장 많은 왕비와 후궁을 거느린 왕은 9대 성종과 11대 중종으로 두 임금님 모두 정비3명에 후궁9명을 두셨습니다.
  • A 궁중음식이 사대부집이나 평민들의 음식과 판이하게 다른 것은 아닙니다. 조선시대 왕의 수라상도 음식구성이나 식사방법은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밥과 반찬을 기본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수라상에는 당대 최고의 맛과 모양을 낸 음식이 최고의 식기류에 담겨 올라갔으며, 왕의 식사에만 다르는 특별한 절차가 있었던 점에서 일반인과 달랐습니다.
  • A 경복궁에는 임금님을 도와서 나랏일을 보는 관리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남서쪽에 관리들의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승정원, 임금님이 나랏일을 결정할 때 도움을 주는 홍문관, 궁궐을 지키는 내병조 등 여러 관청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임금님과 왕실가족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내의원과 음식을 맡은 사옹원, 옷을 담당하는 상의원 등이 있었습니다.
  • A 궁궐은 나라를 다스리는 왕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던 곳입니다. 그리고 왕과 왕비를 도와서 여러가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나랏일을 보는 관리, 왕실가족들이 생활하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일을 하는 궁녀와 내시, 궁궐을 지키는 군인,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와 병을 고치는 의사 등 많은 사람들이 궁궐에서 살거나 출입을 하면서 일을 했습니다. 시대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대개 3000명 정도가 궁궐에서 살거나 궁궐을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왕실가족, 궁녀, 내시 등이 500명 정도이고 궁궐을 지키는 군인이 2000명 정도 그리고 나랏일을 보는 신하들과 궁궐에서 일하는 사람이 500명 정도입니다.
  • A 한글을 창제한 장소인 집현전은 현재 수정전이 있는 궐내각사 자리에 있었습니다.
  • A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게 글자를 사용하도록 '훈민정음'을 만들었습니다. 다른 나라 글자들은 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누가 만들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글은 만든 사람들과 만든 시간을 알 수 있고 과학적이기 때문에 외국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한글의 우수성으로 인해서 세계적으로도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인정을 받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 A 경복궁은 1395년에 창건한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입니다. 북으로 백악산(지금의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진 한양(서울)의 중심이었습니다. 이 후 확장과 중건을 거듭하다가 1592년에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경복궁은 270여 년간 복구 되지 못하고 방치되다가 1867년에 이르러서야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습니다. 중건한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경복궁은 일제강점기 때인, 1915년에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주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90% 이상의 전각이 헐렸습니다. 다행히 1990년부터 복원사업을 추진해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했으며, 2010년에는 1차 복원으로 광화문이 원형복원 되었습니다. 또한 2011년부터 2030년까지 2차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현재 경복궁 1차 복원사업을 통해 고종 중건당시의 약 25%가 복원되었습니다.
  • A 태조 이성계는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우고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왕실의 조상을 모시는 '종묘'와 땅과 곡식의 신을 모신 '사직'을 건설하고, 왕실가족과 나랏일을 돕는 신하들이 머무르는 '궁궐'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궁궐을 짓는데 걸린 시간은 10개월 정도였습니다. 궁궐 공사 이전에 먼저 땅을 잘 살피는 조사를 하였고, 태조 3년(1395) 12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다음해 9월에 완성하였습니다. 궁궐 안에는 나랏일을 의논하는 곳(외전), 왕과 왕비께서 생활하는 곳(내전), 신하들이 출근해서 일하는 곳(궐내각사), 왕세자와 왕세자빈이 생활하는 곳(동궁) 등이 있었습니다.
  • A 유성룡의 [서애집]의 기록을 보면 "왕실과 관료들이 일찌감치 피난을 떠나고 남은 빈 궁궐을, 왜적이 수도 한성을 입성하기도 전에, 백성들이 궁중으로 침입하여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보물도 약탈했다."라는 기록을 볼 수가 있으니 위의 설은 목격담이 아니라 남에게 전해 들은 것을 사실인 양 적은 것에 불과합니다. 유성룡이 불탄 궁궐을 집적 목격한 시점은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한성을 탈환한 뒤인 계사년(1593) 4월 20일이었는데, 이 때 종묘는 불타고 세 궁궐은 모두 무너진 채였습니다. 그러나 왜군이 한성에 입성했을 때인 1592년 5월 2일에는 경복궁은 전혀 불타지 않은 채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을 허허로움만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왜군을 따라 전쟁에 참여한 종군승(從軍僧) 제다쿠의 [조선일기]에는 왜군이 한성에 입성한 직후 경복궁을 직접 답사한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어서 그때까지 경복궁은 전혀 화재를 입지 않은 채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록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북산 아래 남향하여 자궁(경복궁)이 있는데 돌을 깎아서 사방 벽을 둘렀다. 다섯 발자국마다 누가 있고 열 발자국마다 각이 있으며, 행랑을 둘렀는데 처마가 높다. 전각의 이름을 알 수 없다. 붉은 섬돌로 도랑을 냈는데, 그 도랑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정면에는 돌다리가 있는데, 연꽃무늬를 새긴 돌난간으로 꾸며져 있다. 교각 좌우에는 돌사자 네 마리가 있어서 다리를 지키고 있다......." 이런 기록들로 미루어 보아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은 평양성 전투에서 패하고 한성마저 탈환 당하는 패전이 거듭된 왜군에 의해 소실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A 일제강점기에 경복궁에서 박람회와 미술 전시회가 열리면서 많이 망가지게 되었습니다. 궁궐은 나라를 대표하는 임금님이 계시던 곳이기 때문에 일본이 일부러 망가뜨리려고 했었던 것입니다. 일본은 박람회와 전시회를 핑계로 건물들을 헐어 팔기도 했습니다. 경복궁이 박람회와 전시장으로 사용되면서 임금님이 살던 궁궐이 공원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 A 건청궁 앞은 우리나라 최초로 전깃불을 사용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유학생 유길준이 조선으로 돌아와서 고종 임금님에게 어두운 밤을 대낮같이 밝게 해주는 전구를 소개합니다. 7년 전에 미국의 발명왕 에디슨이 발명한 전구를 비교적 빨리 도입하게 된 것입니다. 고종은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에게 전기공사를 맡기게 되었고 에디슨 전기회사는 건청궁 앞에 있는 연못(향원지)의 물을 끌어들여 전기를 만드는 발전소를 지었습니다. 경복궁에 전깃불이 들어온 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이었고 일본과 중국보다도 2년 정도 빠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한국의 전기 발상지'라고 새긴 표지석을 건청궁 앞에 세워두었습니다.
  • A 명성황후는 향원정 북쪽에 위치한 건청궁 곤녕합에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를 주동으로 한 일본인들에 의해서 시해되었습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 광화문으로 들어와 근정전 서쪽 담장을 돌아서 경복궁 북쪽에 위치한 건청궁으로 몰래 들어갔습니다. 건청궁에는 임금님이 계시던 장안당과 명성황후가 계시던 곤녕합이 있었는데 일본인들은 곤녕합으로 가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을미사변이라고 합니다.
  • A 명성황후 시해 당시 고종은 건청궁 내에 있는 침전인 장안당에 계셨으며 건청궁으로 침입한 일본인들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억류상태에 있었습니다.
  • A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면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모든 궁궐이 불에 타버렸습니다. 선조는 임시로 지금의 덕수궁에서 머물렀는데 궁궐이 다시 지을 때 경복궁은 짓지 못하였습니다. 규모가 커서 재료와 인력을 동원하기 어렵다는 이유와 자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창덕궁과 창경궁을 먼저 짓게 됩니다. 이후에 약 270년 동안 계속 빈자리로 남아있다가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었습니다.
  • A 2006년 9월 28일부터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이 개방되면서 신무문을 통해 경복궁의 출입이 가능합니다.
  • A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인 초상화를 모시던 건물입니다. 또는 빈전으로 사용되었는데 신정왕후와 명성황후의 국상 때 빈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 A 건청궁은 고종 10년(1873)에 건립이 되었으며 그 해 화재로 인해 교태전은 소실되었으며 다시 1876년 대화재로 강녕전 및 새로 재건한 교태전도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고종 임금님이 건청궁을 거처로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1885년부터였으며 1876년 화재로 소실된 강녕전과 교태전은 1888년에 다시 중건됩니다. 1888년 중건된 이후 강녕전은 각국 공사를 영접하거나 진연을 베풀었단 기록을 실록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교태전은 중건 이후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실록기록으로는 확인 할 수 없습니다.
  • A 원래는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처럼 단청이 칠해져 있었으나 복원 후 아직 단청을 칠하지 않고 있습니다.
  • A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생활공간이자 왕세자의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 A 자경전 앞 마당의 석수는 일제강점기에 철거된 서십자각의 계단 난간석에 있던 기둥석으로 일명 법수석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 A 자경전 뒤편 담장에는 '십장생 굴뚝'이 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의미가 담긴 십장생이 굴뚝에 새겨져 있어서 '십장생 굴뚝'이라고 부릅니다. 굴뚝 벽면을 보면 가운데에 커다란 조각이 있고 위 아래에 작은 그림들이 있는데 가운데 커다란 그림이 십장생 조각입니다. 그 안에는 해, 산, 구름, 바위, 소나무, 대나무, 거북이, 사슴, 학, 불로초 등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십장생 조각 위 아래에 불가사리와 학이 새겨져 있습니다,. 불가사리는 불을 잡아먹는 다는 상상의 동물이며, 십장생 굴둑 옆에 '박쥐'와 '당초(식물)'도 있는데 옛날에는 박쥐가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했었습니다.
  • A 성인도리 천귀만수 낙강만년장춘(聖人道理千貴萬壽樂疆萬年長春) 이 집에 사는 분이 성인의 도리를 지키고 고귀함과 장수, 즐거움과 정정함을 오래 누리시라는 의미입니다.
  • A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전하면서 신정왕후를 위해 지은 전각으로 왕의 어머니인 대왕대비의 침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 A 교태전의 굴뚝은 교태전 후면의 아미산을 조성하면서 굴뚝을 함께 조성하여 건물로부터 상당히 떨어져있습니다.
  • A 왕비가 잠을 자는 침전입니다. 강녕전과 같은 공간구성을 하고 있으며 전면에 월대가 없는 것이 다릅니다.
  • A 수라상은 기본적으로 3개의 상이 들어갑니다. 왕 앞의 대원반, 기미상궁 앞에 소원반, 그리고 왕의 수라를 시중드는 수라상궁 앞에 책상반이 들어갑니다. 대원반에는 백반과 곽탕, 김치, 그리고 12가지의 반찬이 놓여지고 곁상에는 홍반(팥찹쌀밥), 전골함, 별식 육회, 은원반에 있는 백반(흰쌀밥)을 드실 수도 있습니다. 곁반의 수저는 기미상궁이 기미하거나 음식을 빈 공기나 접시에 덜 때 사용되었습니다. 책상반에는 짐, 곰탕, 더운 구이, 젓국조치, 전골 등을 놓았으며 책상반의 수저는 전골상궁이 전골을 만들 때 사용되었습니다.
  • A 수라상에 이용되는 식기는 주로 은이나 놋쇠, 도자기로 만들어졌습니다.
  • A 동온돌과 서온돌 둘 다 이용하셨습니다.
  • A 온돌방 내부에는 가구들이 배치가 되어 있어서 관람객 여러분들의 안전과 가구의 보존을 위해 내부입장은 제한하고 있사오니 외부에서 관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A '이산'을 비롯하여 '대왕 세종'등 많은 사극 드라마는 역사적인 사실에 기초하지만 드라마적 상상력이 가미된 팩션으로 의상과 생활상 등은 역사적인 사실이라기 보다는 허구적인 사실에 더 가깝습니다. 강녕전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된 이후 원형의 상태로 그대로 복원한 건물입니다. 또한 강녕전 내부에 재현된 궁중 생활용품들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중인 궁중유물을 그대로 복제하여 재현한 것들입니다. 드라마에서 접하는 크고 화려한 건물 내부와 장식품들은 드라마적인 요소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실제로 조선의 왕들은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검소한 생활을 미덕으로 삼았기 때문에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들을 멀리하였습니다. 조선의 왕 중에 영조와 정조는 평소에도 검소한 생활을 했던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비단옷 대신에 무명옷을 즐겨 입고, 하루에 식사를 2번만 하거나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기도 하였으며, 방에서 방석을 깔지 않고 좌식생활을 하였습니다.
  • A 1917년 창덕궁 대조전에서 난 화재로 수 백칸의 건물들이 사라졌고, 대조전 앞에 있는 희정당도 함께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창덕궁 건물들을 다시 짓는다는 명분으로 경복궁의 건물들을 옮겨서 다시 지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강녕전은 희정당으로, 교태전은 대조전을 짓는데 사용되었습니다.
  • A 경복궁의 침전건물 중에서 강녕전과 교태전의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전해지는 기록이나 문헌이 없습니다. 경복궁에서 왕이 생활하는 여러 개의 침전 중에서도 강녕전만 용마루가 없고, 교태전 일곽의 왕비가 생활하는 전각들에서도 교태전만 용마루가 없습니다. 중국에서는 용마루가 없는 지붕의 형태를 무량각이라고 부르는데 건물의 장식성을 높이거나 일반 건물의 지붕구조와는 차별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여러가지 일반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경복궁에서의 왕과 왕비의 중심침전이라는 상징성을 반영한 건물의 지붕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 A 왕이 잠을 자는 침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사와 관련한 일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왕이 신하들을 불러 은밀히 정사를 논의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 A 경복궁 경회루(국보)는 경복궁 창건 당시 작은 정자가 있던 자리에 태종 12(1412)년에 연못을 더 크게 넓히면서 경회루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지었습니다. 그 후 성종 5(1457)년 실록기사에는 경회루가 기울어져 고쳐 지으면서 돌기둥에 구름과 용, 여러 가지 화초들을 화려하게 새겨 넣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고종 대 중건 당시에 (고종 4년, 1867) 다시 짓게 됩니다. 따라서 경회루의 현재 모습은 고종 4년 당시의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 A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천원지방설을 믿어 왔었는데,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고 편편하다는 이론입니다. 그리고 궁궐 곳곳에도 이 천원지방설을 적용해서 건물을 지었습니다. 예를 들어 궁궐의 건물 기둥을 살펴보면 둥근기둥과 네모난 기둥이 보이는데 각각 하늘과 땅을 상징했습니다. 연못도 마찬가지로 네모로 만들고 연못안의 섬은 대개 둥글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경회루는 유공 인공으로 네모난 연못을 조성하고 그 안에 네모난 섬을 만들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웠습니다. 천원지방의 예외의 건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 A 경회루 동편으로 세 개의 다리가 있고 그 중 가장 북쪽의 다리 난간위에 불가사리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불가사리는 코끼리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철을 씹어 먹고 불을 삼킨다는 상상의 동물로 불을 삼켜버리니까 화재를 막아준다고 생각되어서 궁궐 곳곳에 조각해 세워두었습니다. 나머지는 벽사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상상속의 동물로 역시 나쁜 기운으로부터 궁궐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 A 외국 사신의 접대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벌어지는 염회장소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졌습니다. 이외에 경회루에서 과거시험이 열렸던 적도 있고, 비가 오기를 기원하며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들도 보입니다.
  • A 사정전 안의 유제 칠보 대형 향로는 뚜껑, 받침대, 3족의 형태를 겆춘 대형향로로 화려한 작양문을 중심으로 상하좌우에 만개한 꽃과 꽃잎을 칠보로 화려하게 장식하였습니다. 청나라가 왕실에 보내온 선물로 사정전 안의 것은 복제품이고 진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 A 접이식의자로 야외에서 행사가 있을 때 임금님이 사용했던 의자입니다.
  • A 사정전은 편전으로 왕이 평소에 정사를 보고 신하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던 곳입니다. 또 종친이나 대신들과 함께 주연을 즐기고 왕이 직접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시험이 치러지기도 했었습니다.
  • A 조회는 근정전 밖에서 때로는 근정문 앞에서 치러지는 경우도 있었고, 임금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크게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이 따로 있었습니다.
  • A 근정전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상하의 월대위에 지어졌는데 월대 주변으로는 난간이 둘러쳐쳐 있고 난간 곳곳에 많은 동물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전부 56개가 있습니다. 먼저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네방위신이 동서나북에서 근정전을 지키고 있고 시간과 방향을 나타내고 지키는 12지신 가운대 쥐,소, 호랑이, 토끼, 뱀, 말, 양, 원숭이, 닭 등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외에 월대 모서리에는 벽사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서수들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 A 박석은 한자로 '얇을 박'에 '돌 석'자 입니다. 약 10cm정도의 두께로 화강암을 얇게 다듬어서 사용했습니다. 근정전에서는 주로 국가의 중요한 의식과 행사가 치러지는 곳이기 때문에 다른 건물들의 마당과는 다르게 박석을 깔았습니다. 박석으로 마감한 바닥은 국가적인 행사를 거행하는데 있어서 날씨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을 뿐더러, 햇빛에 의한 반사로 눈부심 효과를 줄이거나, 비가 왔을 때 배수가 원활하게 하는 등 다양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 A 근정전에서 의식이 있을 때에 햇빛과 비를 피하기 위해 차일을 치고 그 끈을 이곳에 매어 고정시켰습니다.
  • A 드무에는 화재에 대비해 물을 담아 두었습니다. 또 불장난 치기위해 근정전으로 달려오던 불귀신이 드므에 비친 자신의 흉측한 모습을 보고 놀라서 불장난을 못하고 그대로 달아나도록 하게 하는 주술적인 의미도 담겨 있었습니다.
  • A 근정전 기단 좌우로 보이는 삼족정의 형태를 가진 청동향로는 근정전에서 국가의식이 행해질 때 사용하던 의기(儀器)입니다. 일반적으로 행사 준비를 마치고 임금이 자리에 앉으면 향을 피워서 시작을 알리고, 행사를 마치면 향을 껐습니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제사를 올리거나 의식을 거행하는데 있어서 분향하는 의식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신성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임금은 상징적으로 천명사상에 따라서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향을 피우는 의식은 하늘과 소통, 교감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과 같은 유교문화권인 중국 또한 자금성의 정전인 태화전에는 향로를 배치하여 황제즉위식을 비롯하여 정전에서 거행되는 행사 시에 향을 피워서 의식을 경건하고 엄숙하게 진행하였습니다.
  • A 궁궐편액 등에 흔히 나타나는 고어 서법으로 속체입니다.
  • A 근정전 월대 십이지신상 중에서 개와 돼지가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전해오는 기록이나 문헌이 없습니다. 다만, 조선시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며, 개와 돼지는 일반적으로 민간에서 더럽거나 천박하게 여겨졌습니다. 우리나라 비속어 중에는 '개돼지만도 못하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 A 고종실록에 근거한 오악은 아래와 같습니다. 동서남북과 가운데 순서대로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백두산, 삼각산(북한산)입니다. 중국에서 말하는 오악과 조선 초의 오악은 그 대상이 다릅니다. 조선에서는 종묘에서의 제사뿐만 아니라 이런 산천에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때 5개의 산, 즉 오악을 정하고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 A 경복궁 근정전에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있고 웅장하게 높은 근정전 건물이 보입니다. 근정전까지 이어진 길은 '어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도 좌우에 비석처럼 생긴 돌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돌들은 '품계석'이라고 합니다. 품계석은 근정전에서 행사를 할 때 신하들이 자신의 지위에 맞게 줄을 설 수 있도록 표시한 돌입니다. 근정전을 바라보면서 오른쪽(동쪽)에 있는 품계석에는 문신들이 차례로 줄을 서고 왼쪽(서쪽)에는 무신들이 품계석에 따라 줄을 서게 됩니다.
  • A 근정전은 고종 임금 때 복원되었습니다. 박석도 그때 당시의 것입니다.
  • A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으로 국가행사나 의식 때 사용되었습니다. 왕의 즉위식, 조하의식, 외국사절의 환영행사 등이 열렸던 곳입니다.
  • A 현재는 광화문이 복원공사 중이어서 볼 수 없지만 광화문 좌우에 호랑이처럼 생긴 조각상이 있는데 이 조각상을 '해태'라고 합니다. 해태는 상상의 동물로 해치라고도 불렀는데, 사람들의 잘잘못을 가려서 잘못이 있는 사람은 벌로 머리에 난 뿔을 사용하여 찔렀다고 합니다. 지금은 해태상이 광화문 바로 앞 좌우에 있지만 원래는 광화문 앞에서 대략 5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고 가마나 말을 타고 경복궁에 온 사람들도 해태상 앞에서부터는 가마와 말에서 내린 후에 걸어서 경복궁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 A 영추문은 최근 해체된 광화문과 같은 철근콘크리트 구조입니다. 영추문은 일제강점기 당시 전차길이 조성되면서 헐리고, 또한 궁역도 안쪽으로 이전되었기 때문에 현 도로 사정으로는 원래대로의 복원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따라서 국가유산청은 우선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원형으로 복원하였으며, 향후 장기 복원계획에 의하여 다른 전각들을 복원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 A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고종시대에 경복궁 중건과 함께 다시 지었던 광화문을, 일제는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해체하고 건춘문 북쪽(현 민속박물관 정문)으로 옮겼습니다. 그나마 옮겨지은 그 광화문마저 한국전쟁 당시의 폭격으로 파괴되어 석축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1968년 광화문은 복원되면서 전통 목조 건축물이 아닌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복원되었습니다. 또한 원래 동십자각과 같은 선상에 있었던 광화문은 앞에 도로를 확장하기 위해 북쪽으로 10미터 이상 밀려났습니다. 좌향 또한 일제가 총독부 청사를 건립하면서 조선황국화의 상징이던 남산에 위치한 조선신궁을 향하도록 한 것에 맞추어 원래보다 3.75도 동쪽으로 틀어졌습니다. 그래서 광화문-흥례문-근정문-근정전-사정전-강녕전-교태전을 잇는 중심 축선에서 어긋났었던 광화문을 2010년 원형복원하게 되었습니다.
  • A 경복궁은 동서남북에 네 개의 문을 두었는데 그 중 남쪽으로 난 문이 광화문으로 경복궁의 정문에 해당됩니다, 광화문에는 세 개의 흥예문을 두어서 가운데의 문으로는 임금님이, 좌우의 문으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드나들었습니다. 또 광화문 문루에 종을 걸어 시간을 알릴 때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 A 궁궐에서는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나기 위해서 먼저 온돌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찬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병풍이나 지금의 커튼 같은 천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 A 먼저 행각과 회랑의 용어부터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행각이란 건물의 둘레를 감싸고 지어진 집이고, 지붕과 복도가 있으면서 주로 통행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회랑입니다, 경복궁 근정전을 예로 들어 설명을 드리면 근정전 행각은 현재는 지붕과 기둥만이 남아 있어서 회랑처럼 보이지만 본래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벽들이 있었던 행각이었습니다. 근정전의 행각이 훼손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이고 이전에는 동쪽 행각에는 서방색(임금님이 사용하던 벼루와 필묵을 담당), 관광청(과거와 관련된 업무담당), 양미고가 있었고, 서쪽 행각에는 내삼청(왕실 친위부대로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를 통틀어 일컬으며 금군 삼청 이라고도 함.), 충의청 (종친부와 충훈부에 소속된 하급관리인 충의가 근무하던 사무실), 예문관(임금이 행사 때 하는 축사, 기념사, 명령문 등에 대한 일을 담당), 향실(행사 때 사용하는 향과 축을 맡은 관청), 액정시(대궐안의 잡무를 담당) 등이 있었습니다.
  • A 지금은 건물의 넓이를 가로와 세로의 길이를 곱해서 표시하지만 옛날에는 기둥과 기둥 사이를 1칸으로 보고 그 칸 수를 세어서 넓이를 표시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경복궁에서 가장 큰 건물인 근정전은 앞면의 기둥이 6개인데 기둥과 기둥 사이를 1칸이라고 하니깐 근정전의 앞면은 5칸이며, 근정전 옆면도 기둥이 6개라 5칸입니다. 그래서 근정전 건물의 크기는 앞면 칸에 옆면 5칸을 곱해서 모두 25칸 건물이 됩니다.
  • A 북궐도형(국립문화유산연구원), 북궐도형(서울대학교 규장각), 궁궐지(고종연간) 등의 문헌을 통해 확인한 결과 경복궁 내 화장실은 41개소 70칸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 A 동십자각은 경복궁의 궁성문과 이어진 각루로 전면의 좌우 끝에 위치해 있어서 동쪽 각루는 동십자각 서쪽 각루는 서십자각이라고 하였는데 서십자각은 일제 강점기때 사라지고 동십자각도 경복궁과의 사이에 도로가 나서 경복궁과 이어져 있지 않고 도로 한가운데 떨어져 있습니다.
  • A ○ 맞배지붕: 지붕의 앞면과 뒷면을 사람 인(人)자 모양으로 배를 맞댄 모양 ○ 우진각지붕(흥례문, 근정문): 맞배지붕의 양측면을 다시 삼각형모양으로 끌어내려 추녀가 4면에 고르게 만들어져 흔히 우리가 함석지붕에서 보는 바의 형식 ○ 팔작지붕(경회루, 근정전): 우진각 지붕의 세모꼴 측면에 다시 여덟 팔(八)자의 모양을 덧붙여 마치 부채살이 퍼지는 듯한 형상. 합각지붕이라고도 함.
  • A 석비레, 모래, 강회를 1:1:1로 배합한 미장재입니다. 점착력이 있고 굳으면 견고합니다.
  • A 1443년 세종 25년 음력 12월 훈민정음이 창제되었으나 당시에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894년 고종 31년 대한제국 칙령 제1호 한글 전용 대원칙에 관한 법령이 공포된 뒤부터 한글이 명실공히 우리나라의 국문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공식문자는 한자였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국가의 서류, 건물 등에는 한글이 아닌 한자가 사용되었습니다.
  • A 고구려 시대의 고분인 안악 제3호의 부엌 그림에 음식을 끓이는 부뚜막과 난방용 아궁이가 그려져 있어 온돌이 이 시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통구들(방전체가 온돌로 되어있는 경우)로 바뀌어 방 어디에나 앉고 눕게 된 것은 고려시대 중기 이후 일반화되고 조선시대 초기가 되어서야 중부 이남에 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 A 천연 광물에서 채취한 자연 염료를 사용했던 예전 건물들은 100년에서 수백 년이 지나도 단청의 빛깔이 곱게 퇴색되어 남아있는 경우가 있는데, 지음은 화학안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20년~30년에 한 번씩 보수해야합니다.
  • A 강녕전과 교태전 후원 등 경복궁 곳곳의 마당에 동그란 구멍 세 개가 있는 곳이 보이는데 조선시대부터 사용되어졌던 배수구입니다. 또 건물 문 밑에 십자로 구멍이 나있는 것은 풍혈이라고 해서 바람이 통하는 통기구입니다. 이런 풍혈이 보이는 건물은 모두 마루방으로 되어있는데 마루는 나무 소재이기 때문에 습기가 취약합니다. 그래서 통기구를 만들어 통풍을 원활히 했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풍혈이 보이면 마루방, 풍혈이 보이지 않으면 온돌방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 A 경복궁 복원사업은 지난 1990년부터 2010년까지 1차 복원으로 경복궁의 중심축선상의 주요전각 복원(구 조선총독부 철거, 광화문, 흥례문, 강녕전, 교태전 복원 등)을 완료하였습니다. 2011년부터 2030년까지 2차 복원사업을 진행 하고 있으며, 그1단계 사업으로 2015년에 소주방 복원을 완료하였고, 2016년~2018년까지 흥복전 권역을 복원할 계획입니다. 경복궁 복원시점을 고종시기 중건(1867년)이후부터 궁궐로서 의미를 상실한 공원화(1907년) 이전까지 설정하여 건물복원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 A 궁궐에 자생하는 나무는 박상진저 <궁궐의 우리나무>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에서 관찰, 기록되고 있는 새가 450여종이 있는데 창덕궁, 창경궁 등 궁궐에서 서식하거나 번식하는 새는 100여종으로 텃새 20종, 여름 철새 31종, 겨울철새 21종, 나그네새 17종이 관찰되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꽤 많은 새들이 궁궐을 찾고 있습니다.
  • A 경복궁을 둘러보다가 건물 기둥과 지붕 처마 밑에 마치 그물처럼 생긴 것들이 있는데 이 그물을 ‘부시’라고 합니다. 새들이 날아와 처마 밑에 둥지를 짓거나 걸터앉지 못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새의 배설물로 단청이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 A 궁궐 지붕을 자세히 보면 지붕을 덮고 있는 기와뿐만 아니라 동물모양의 기와들이 있습니다. 동물 모양의 기와들은 조각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지붕을 덮고 있는 기와들처럼 구워서 만든 기와의 종류입니다. 이러한 기와를 '장식기와'라고 하는 데 궁궐에 불이 나지 않도록 지켜주는 상상의 동물들이 지붕을 지키고 있는 셈입니다. 지붕 맨 위 좌우 끝에 있는 장식기와를 '취두'라고 합니다. 취두 아래로 내려오면 '용두'가 있고 그리고 용두 앞으로 나란히 줄지어 있는 것들이 '잡상'입니다. 잡상은 소설 서유기의 주인공인 삼장법사,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 등 상상의 동물들로 되어 있습니다. 줄지어 선 잡상 아래를 보면 사래 끝에 끼워진 '토수'가 있는데 토수는 용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 A ○ 궐내각사 : 궁궐 안에 설치된 관서들로 승정원, 홍문관 춘추관 등이 경복궁내 서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 궐외각사: 궁궐 밖에 설치된 관서들로 의정부, 육조, 사헌부, 한성부 등이 지금의 광화문 남쪽 좌우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 A 『시경(詩經)』,「주아(周兒)」편에 나오는 ‘기취이주(旣醉以酒) 기포이덕(旣飽以德) 군자만년(君子萬年) 개이경복(介爾景福)’에서 두 자를 따서 경복궁(景福宮)‘이라 지었습니다.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는 구절에서 따온 ‘경복’의 의미는 길이 길이 크게 복을 누린다는 말로 새 왕조의 번영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 A - 국보 경복궁 근정전 - 국보 경복궁 경회루 - 보물 경복궁 자경전 - 보물 자경전 십장생 굴뚝 - 보물 경복궁 아미산의 굴뚝 - 보물 경복궁 근정문 및 행각 - 보물 경복궁 풍기대 - 보물 경복궁 사정전 - 보물 경복궁 수정전 - 보물 경복궁 향원정
  • A 우리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다른 관람객들의 불편을 막기 위해서 반려동물을 출입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단, 시각 장애인의 반려동물은 예외로 합니다.
  • A 경복궁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우리의 문화유산을 잘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일반 유원지와는 다르게 음식물 섭취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 A 경복궁 홈페이지 관람정보에 있는 리플릿을 다운로드 하거나, 관람코스 안내를 참고하십시오.
  • A 수문장 교대의식은 경복궁 휴궁일인 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진행됩니다. 단, 비오는 날이나 혹한기, 혹서기에는 약식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흥례문 광장에서 진행됩니다. 자세한 사항은 국가유산진흥원 수문장교대의식팀(02-3210-1645)으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수문장 교대의식: 10시, 14시 / 1일 2회 *광화문 파수의식: 11시, 13시 / 1일 2회
  • A 정문 흥례문 입구에서 대여하실 수 있습니다. 단, 예약은 불가능하고 휴일이나 관람객이 많은 날에는 수량이 한정되어 있어서 빌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A 주차장은 별도의 업체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관람료와 마찬가지로 신용카드 결재가 가능합니다.
  • A 경복궁은 국가기관인 국가유산청과 궁능유적본부에서 직접 관리하는 사적으로써 법으로 정해진 무료 관람일은 없고, 국가유산청과 궁능유적본부가 별도로 무료관람일을 지정하고 있습니다. 주로 명절에 해당하는 추석과 설날 당일에 한하여 무료 개방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또, 매월 마지막 수요일에도 '문화가 있는 날'로 무료 개방을 하고 있습니다. 관람정보는국가유산청과 궁능유적본부 홈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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